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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고 암송했던 역사, 북한의 남침설!

그런데 대학에서 와서 학회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돌베게출판사에서 출판한 박세길씨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들이대면서 무조건 남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궁금해서 찾아본 외국 저자의 

책에서도 입장은 비슷했던 것 같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미국의 애치슨라인 설정, 38선에서의 남한의 빈번한 도발은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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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한에서 남침설에 의심을 제기한다거나 북침설을 주장한다거나 양보해서 양측의 잘못을 둘 다 인정하면 무서운 비난과 모욕에 직면해야 했다.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남한에서는 절대적인 금기였고 남침설이 정설이었다. 이밖에 다른 주장은 절대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었다. 국가보안법에 걸릴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글을 보았다. 이적 목사님의 글에 있었고 조헌정 목사님의 글에도 있었다. 물론 나도 내 페이스북에 공유를 했다. 이 분들이 작성한 글이 아니라 퍼나르는 글이었던 것 같다. 남침설 절대신봉지들은 이런 글이 빨갱이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럴만한 부분도 있겠지만 분명히 주의 깊게 재론해야 역사이다.

한국전쟁에서 남한은 절대 피해자이고 절대 선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남이 북을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남도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악행을 범했다. 당시 산업이 발달했던 북이 당한 물질적 피해를 숫자로 환산한다면 결코 남한은 비교대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만이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그 반성은 결코 정치적인 잣대로 재단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미래를 위한 역사이다. 사실 전쟁 앞에서 누가 먼저 침범했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공포로 몰아 넣고 그것을 통해 주판알을 튕기며 이익을 계산하는 사람들과 전쟁 자체가 문제일뿐!

페이스북에서 공유되고 있는 글을 여기에 퍼날라본다. 반성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관심 있게 읽어볼만하다.

남침인가 ?북침인가?
ㅡ조선전쟁(한국전쟁)의 진실ㅡ

육이오 인민군의 공격이 있기전에 미국은 북지역을 수백차례 공격한 자료가 있다. 일독 하시고 굴곡진 역사를 바로 보는 혜안을 가지시길 바란다 (편집자주)

6.25전쟁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채병덕이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고 하였다.
『당시 국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말에 의하면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의 기간에 38선 일대에서 1천 여회 가까이 북한을 공격 하였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이북주민들을 살해하고 수천 호 민가를 소각했다. 이것은 「국군의 강대성을 시위하며 이북주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라」는 로버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참모총장 이용운은 7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49년 8월 10일에 있은 몽금포기습작전을 계기로 6.25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쟁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1951년 5월 미 상원 외교군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북한군은 38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배치돼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방어를 위해서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위한 배치는 결코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군은 자기의 모든 물자와 장비를 38선에 집결시켰다.』

50년 6월 19일 미국대사와 주한미군과 이승만 정권 수뇌들과 가졌던 회담에서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북진준비상황을 직접 보고 미비한 점이 없으면 곧 북진을 단행하자는 트루먼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왔다. 와서 보니 준비는 이만하면 족하다.
전기는 왔다. 우선 남한에서 먼저 개전하라. 개전후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미국을 믿으라.
만일 그 기간에 전국이 불리하게 되면 방어태세로 넘어가 2주일간만 유지하라. 그러면 미국의 참전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1949년 6월 5일부 뉴욕 헤럴드 지에 실린 서울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주둔 미 군사사절단 단장 로버트 장군은 <5백 명 이상의 미국 군사교관들을 가지고 북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한군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표현 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사령부에서 열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확실히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부대는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막대한 양의 탄약을 써버렸으며 게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방군의 진공은 오직 미 군사절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쪽 에서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쪽≫

6월 20일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한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해 내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맡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 되었다. -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북한군이 남한군으로부터 대대적인 불의의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ㅡ자료 펌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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