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내가 꿈꾸는 미래의 정치 · 사회 · 공동체는 무엇인가?이를 위해 우리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리 : 박형순 님 (평화교회연구소)
A. ‘나중에’를 ‘지금’으로. ‘여성’, ‘젠더’, 그리고 ‘일상의 민주화’는 모든 시기의 운동마다 늘 ‘나중에’ 취급을 받았다. 언제나 시급하고 중대한 정치적·사회적 의제들의 그림자에 가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정작 그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든다. 게다가 교체된 정권에서마저 여성과 젠더와 관련한 문제들이 동일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앞으로의 정치와 사회와 공동체는, 여성과 젠더와 일상의 민주화를 ‘바로 지금’ 외치고 실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A. 세대 갈등. 세대 간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우리 안에도 이러한 갈등이 존재한다. 각자의 세대 간에 지닌 ‘차이’와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것에 대한 과도한 인식은 서로 간에 소통을 위한 만남조차 시작하지 못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다름이 서로를 악마화하지 않도록 만남을 지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A. 반성 없는 용서. 국가와 국가 간 과거사의 문제, 혹은 국가 안에서의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 어떠한 반성도 없이 섣부른 용서로 덮게 된 것들이 많다. 그러한 안일함은 지금의 현실에서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 각자 혹은 서로에게 면죄부를 주게 함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반복하게 한다. 지금이라도 과거의 역사적 일들에 대해 명확하게 문제를 인식하고, 그렇게 해서 명백히 밝혀진 문제들에 대한 합당한 처벌과 응징이 이루어져야 한다.
A. 희미해진 시각을 인정. 현재 ‘위기’라고 인식하는 이 상황은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하다. 지난 나날들 동안 앞장서서 운동하고 싸워왔던 우리들의 시각과 방식에 한계가 찾아왔음을 느낀다. 한때는 시대와 사회를 명확하게 바라본 시각이, 시간이 지난 지금은 희미해졌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미 지금까지의 방식이 지금의 정치 권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것으로 이 사실을 겪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시대에는 지금의 새로운 시각을 가진 이들이 꾸준히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고, 그들과 함께함으로 조화를 이루어 또 다른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A. 평등이 아닌 ‘공정’의 공동체. 모두가 다 똑같이 획일적인 수치의 것들을 얻는 ‘평등’보다, 모두가 저마다의 사정과 상황에 맞게 얻는 ‘공정’을 세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특히 기득권에 대항하며 싸운 공동체가 자신들이 기득권이 되는 과정 속에서 권력화되고, 권력화된 세력은 타인과 타공동체에 폭력을 행하는 현실을 경험한다. 이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A. ‘반대를 위한 반대’를 멈추기.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은 철저하게 ‘반사이익’의 구조로 움직인다. 어떠한 이유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과 반대된 존재들에 대해서 반대 그 자체를 위한 반대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한다. 이 사회에 필요한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 아닌, 그저 반대 진영에 대한 반대의 힘만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A. 성공 사례의 부족. 그간 나라, 권력, 자본, 폭력에 대항하여 무수한 운동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실제로 개인이든 단체이든 싸워온 다양한 운동들에 ‘성공 사례’는 현저히 부족하다. 이는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우리의 운동에 대해 회의감으로 반응하게 한다.
A. 구조의 문제 좌시. 현재 일어나는 모든 사회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구조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구조가 변해야 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 모든 탓을 개인에게 돌리고 있다. 개인을 혐오하게 하고, 개인에게 해결하도록 좌시한다. 자연스럽게 개인을 배제하게 되는 정서가 강화될수밖에 없다.
A. 거대 담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우리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은 그간 거대 담론의 영역에서 손쉽게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안도해 왔지만 실제 그러지 못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오직 하나의 그릇에만 담아낼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의 거대 담론으로 묶이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모든 의제가 지워질 수도 있다. 이러한 서로의 ‘다름’을 추구하는 것을, 항간에는 ‘분열’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름’과 ‘분열’은 동일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간의 방식처럼 빽빽하고 획일적으로 묶이는 연대의 방식보다는, 다름 그 자체가 존중되는 방식의 ‘느슨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A. ‘안전하지 못함’의 문제. ‘세대’이든 ‘젠더’이든 우리가 소위 그 안에서 ‘갈등’이라고 이름 지어진 문제는, 단지 ‘차이’가 존재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안전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지 않을까? 그리고 대개 어떤 공동체에서든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안전치 못함을 단지 ‘갈등’이라고 여기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염두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함께 하기 위해 모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참여하는 모두에게 안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A. 각자의 의제에 대한 존중.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연대’는, 다양한 이들이 각자의 의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서로의 운동에 대해서 존중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의제에 대해서는 우열이나 위계를 가를 수 없다. 서로의 의제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운동으로 변화되기 원하는 세상은, 여느 정치인들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마치 실험적인 것처럼 정책을 쉽게 바꾸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회의 문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지 못한 채 자기들이 좋다고 여기는 정책을 호떡 뒤집히듯 이리저리 바꿀 때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A. ‘정체성 정치’의 한계. ‘보수’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정체성들이 있다. 20대 남성, 자유민주주의 등. 이러한 명확한 보수의 정체성은 결국 거기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을 지우게 되는 결과로 지금 의 시국이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 진영은 어떤가? 진보 역시 자신들의 ‘정체성 정치’를 통해 반대 진영에 대항해 승기를 잡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기기 위한 전략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들이 분명 있다. 진보의 정치적 방향은 정체성을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경계와 구획을 흐리는 방식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포함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환대를 위해.
A. ‘정체성 정치’의 한계. 시국에 대한 인식은 각자가 다 다를 것이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분명 연결되어 있는 지점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의 고유하고 다양한 시국에 대한 인식을 존중하는 동시에, 서로의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서 자각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A. 생활 권력, 일상 권력. 시국에 대한 우리의 모든 운동들은 현존하는 권력들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갈 수밖에 없음이 불가피하다. 때로 그것은 ‘정치 권력’이 되기도, ‘경제 권력’이 되기도, ‘종교 권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작동하는 ‘생활 권력’ 또는 ‘일상 권력’도 분명 현존하는 문제이다. 각자의 최소의 구조 단위 속에 살면서, 1대 1의 관계에서부터 작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을 수놓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권력의 언어와 행동을 발화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